백운면(白雲面)의 유래

  • 작성자 : 문화관광과
  • 등록일자 : 2001-09-28
  • 조회 : 2296
  • 읍면

    백운면

백운면은 옛날에 남면(南面)과 일동면(一東面)을 병합해서 이루어진 면으로서 신라때는 장계현에 속하였고

고려초에는 전주현(全州縣)에 그리고 공양왕 3년에는 마령현(馬靈縣)에 속하였다가 이조태종(李朝太宗)

13년까지 월랑현이었는데 1914년 면폐합으로 백운면이 되었다.



본면 신암리에는 고려조때에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충익공 만육 최양선생의 돈적소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

을 세워 태조가 되자 최양은 불사이군의 충절로 경기도의 두문동에 숨어살다 백운면 신암리의 중대산 석굴

까지 와서 3년간 돈적한바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세칭 최선생 돈적소라 불리워지고 있다. 보기에는 대단치 않지만 이러한 돈적소는

충의사상과 강륜절개를 지킨 옛 조상들의 선비사상의 상징이라고도 볼수 있다. 또 많은 사람이 난(亂)을

피해서 생명을 보노한 곳이 있다. 본면 노촌리(蘆村里)에 오만동이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임진왜란때 이곳에 5만명 이라는 많은 사람이 피신을 했는데 왜적이 바로 그밑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들키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 남았다 하여 그 피신터 입구 바위에 오만동이라 새겨놓고 그 골짝을 오만동

골짝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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