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성복(吳成福) 정려
정려문은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吳成福之閭' 이다. 수승재(修承齎)오성복은 본관이 함양으로 성산 오빈(聖山 吳玭)의 7세 손이다.
수 승재는 마령 평지에서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부모에 효도하고 학덕이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한 분이었다. 음식을 만들면 반드시 부모님께 먼저 드렸고, 처음나는 과일이나 나물도 먼저 부모님에게 드렸으며, 여름이면 물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고 겨울이면 부모님이 좋아 하시던 토끼고기와 꿩고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어머니가 죽자 3년간 조석성묘를 했다고 한다.
- 오빈(吳玭) 정려
정려문은 '忠臣將仕郞成均館學諭吳玭之閭' 이다. 성산 오빈(聖山 吳玭)은 이조판서 팽숙(膨叔)의 증손이며, 사운(思雲)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등용 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직접 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고경명 휘하로 달려가 금산전투에 참가 하였다가 그 싸움에서 아군이 패하게 되자 이듬해 다시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달려가 총 공격해오는 왜군과 혈전을 벌이다가 끝내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뒤에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정려는 崇禎後 丁巳(1677)년에 내리었으며 오성복 정려각 내에 함께 있다. 오빈 정려는 효자정려가 아니라 충신정려 인바 이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 점이 있다. 즉, 이 정려가 오빈의 정려가 아니라 오형(吳珩)의 정려로 일부 기록에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오형은 오빈의 종제(從第)로 임진왜란시에 적과 사우조가 고경명의 의진에 들어갔으나 오빈이 고경명의 막하에 있으면서 오형의 거의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뜻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병을 의로서 일으킨다 할지라도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둘이 죽으면 장차 누가 선영에 제사를 지내겠는가. 너는 돌아가 효도를 극진히 하라고 말했다." 이에 바로 선영지하에 내려와 노모봉양에 정성을 다하니, 왜졸 또한 그효에 감복하여 해치지 않았다 한다.
오형이 효자일망정 이 효자각에는 분명히 오형의 정려는 없고 다만 오빈의 정려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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