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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28 충효쌍전의 전동흘(全東屹) 관리자 07/13 11:09:03 745

공은 고려 문종왕때 천안부원군 충민공 전 락의 원손으로 대호군 전극례의 6대손인바 진안읍 가림리 탄곡에서 1610년(광해군 2년)에 출생하여 만암 이상진과 동문수학하며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여 진안현 월랑관의 괴귀를 쫒아낸 대담한 성품이었다. 

1624년(인조 2년)서울로 올라가 월사 이정구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그 해 이괄이 난을 일으켜 인조가 공주로 파천하니 나이 15세에 지원병이 되어 임금에 충성을 다했으며 1627년 (인조 5년) 정묘호란때 부친대승이 순절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고 3년간시묘하면서 병서를 탐독하던중 1636년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광주성 남쪽 10리쯤에 진을 친 공은 청군을 맞아 좌충우돌,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성을 지키면서 용맹을 떨치니 적장도 하늘이 낸 용감한 장수라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끝내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한후 동궁과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니 공은 동구의 배종무관이 되어 청나라에까지 갔다.공은 이 기회에 청나라의 국방태세,군사배치, 요새의 이정 등을 낱낱이 조사하여 군사상의 전략을 세우는데 기여했으며 귀국해서는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낙향했다. 

1650년 (효종 1년) 봉림대군이 등극한 후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때 우암 송시열은 공과 이상진, 소두산등 세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니 이들을 호남3걸이라 하였으며 공은 선전관내삼청과 흥덕현감이 되니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후 강원, 충청, 황해병사를 거쳐 벼슬이 포도대장에까지 이르렀다. 

1679년(숙종 5년)삼도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여 봉직한 후 3년후 서울에 돌아오는데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공의 행색을 은밀히 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일행이라고 하는 것이 말 한 필에 불과하여 일개 가난한 선비의 행색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내시가 아무리 살펴 보아도 별 다른 물건은 없고 다만 통제사 말 아래에 고기 기름 한병이 달려 있었다. 공이 입시하여 임금을 배알하니 임금이 묻기를 "경이 이번 행차에 어유(어유) 한병을 가지고 왔다는데 그 기름은 어디에 쓸려고 하오?" "신이 본래 집안이 가난하여 긴 겨울밤 병서를 읽으려 하오나 불 밝힐 양초가 없아옵기로 통영에서 나는 어유를 한 병 가져 왔나이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더욱 감탄하여 "옛말에 청백리라 하더니 동흘을 이름이로다" 하며 칭찬하였다. 이에 공은 나이많음을 고하고 고향에 돌아왔으니 나라에 충성하는 정성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청나라 몰래 창덕궁 금원옆에 대보단을 설치하고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태조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 왔는데 청국의 사신이 이것을 문제삼아 조정에 압력을 가해 온 일이 발생했었다. 사색당쟁만 일삼던 중신들은 청나라의 비위를 상하게 할수 없다하여 진사할 방법을 찾고 있었으나 묘책이 없게 되자 낙향하여 노후를 보내고 있던 공을 임금께 천거하였다. 임금이 공을 불러 이 사건을 해결할 계책을 물으니 "이 사건은 훈련대장의 직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나이다" 하였다. 

임금은 바로 공에게 훈련대장겸 도위도총부도총관을 내리셨다. 이에 공은 군사 수백명을 다섯반으로 나누어 도열시킨 후 청국의 사신을 불러들여 벽력같이 호령하며 그의 교만함을 꾸짖었다. 청국사신은 혼미백산 잘못을 사죄하니 곤장삼도로다스려 풀어줌으로써 허겁지겁 제나라로 달아났으며 이사건을 아무 탈없이 해결 해 낸 것이었다. 또한 공은 철산부에서 일어난 장화.홍련의 원옥사건을 해결 한것 으로도 유명한데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들이 원인모르게 횡사함으로 공이 이를 자원하여 철산에 부임하여 장화. 홍련의 원혼을 풀어 주었으며 이를 소재로 하는 장화.홍련전은 이조중엽의 대표적인 민중소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공의 나이 아흔 여섯의 고령에 이르매 노환으로 점차 위독하였다. 이에 자제들이 의원을 데려오니 공은 크게 꾸짖어 물리치며 "대장부 살아 생전에 나라의 부꾸러움을 씻지 못하고 구차한 생명을 이어 간다는 것이 어찌 무사의 부꾸러움이 아니리요" 말을 마치고 운명하니 1705년 (숙종 31년) 8월초 하루였다. 임금이 공의 죽음을 들으시고 대궐에서 애도하시며 예관을 보내어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 기슭에 예장(禮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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