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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333 항일 의병장 최 제학(崔濟學) 관리자 07/13 11:09:59 753

선생의 자는 중열(仲悅)이요 호는 습제(習齊),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고려 인종때 평장사상주국봉탐진백 장경공 사전(平章事上柱國封耽津伯 莊景公 思全, 1077~1137)의 후예로서 지은 성호(芝隱 成鎬)의 아들로 선대에서 부터 모두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어 백부인 기호와 게부 명호등 3명제가 의좋게 살았다는 삼우당의 터가 지금도 성수면 목동리에 전해오고 있다. 

선생은 1882년(고종 19년)에 성수면 목동에서 태어나 여섯살때 어머니 장씨를 잃고 형수인 양씨밑에서 자랐다. 11세에 현학(縣學)에서 경(經)을 강하게 되었는데 읍재(邑宰)가 사사로히 고관의 아들에게 장원을 내리는 것을 보고는 이에 항의하니 온 마을에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친찬하였다. 

1894년 (고종 31년)에 선생의 할아버지인 지은공 (芝隱公)이 동학당의 김개남부대에 의해 살해되자 선생은 장검을갖추고 복수를 한뒤에 상을 치르겠다고하는것을 백형인 제태가 말려 집안에 감금시켰는바 얼마뒤에 김개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야 상을 치르니 선생의 나이 13세때였다. 

1896년(건양원년)에 선생은 3년상을 마치고 약관의 몸으로 면암 최익현, 간재 전우, 연재 송병선, 송사 기우만 등 제현을 찾아 뵈었는데 백형의 명으로 면암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면암은 「중열 (仲悅, 선생의 字)은 천품이 순미(洵美)하여 중후온아(重厚溫雅)하고 조금치라도 한방(閑放)한 뜻이 없으니 가히 그 가정에서 평소에 훈습(薰習)이 있음이요 또 맛있는 간장이 피어오르는것과 같고 좋은 난초가 싹이 돋는 것과 같으니 이미 공부길을 잡아 성공의 싹이 보인다.」하였다 한다. 

1905년 (광무 10년) 2월에 선생은 서울에 올라가 석동으로 면암을 찾아 뵈었는데 때에 왜병에게 잡혀 갖은 모욕을 받고도 끝까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좌우호종(左右護從)하여 포천(抱川)을 거쳐 정산(定山) 에 이르렀다. 

10월 이등박문 (伊藤博文)이 서울에 이르러 을사보호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구동에서 의거의 방도를 면암에게 올렸으나 면암이 병중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왜병이 지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오적신 (五賊臣)을 청토(請討)하는 상소만 올리게 되었다. 그 해 12월 애산 정제규와 더불어 면암에게 품의하여 노성(지금의 논산)의 궐리사에서 유회를 베풀고 「유도를 다시 세우고, 중화와의 맥을 보장하며, 청국을 위하고, 원수들과는 절교할 것)」등을 결의하고 일광 정시해를 만나게 되었다. 

1906년(광무11년)에 선생의 나이 25세가 되는 정월,수남 고석진과함께 면암에게 의병을 일으킬 계책을 알리고 남하하여 전 낙안군수 임병찬을 만나 거사를 모의했다. 이때 모여든 동지들이 정휴탁, 조규하, 박봉양, 조우식, 문달환, 임현주, 조영선, 고제만, 유종규, 정시해, 이용길 등이었다. 

면암은 선생에게 모병과 군량을 책임지우니 비로소 선생은 면암의 좌우에서 참모가 되어 의병의 선봉장이 된 것이다. 명망을 위시한 의병들은 그 해 윤4월 8일 정읍의 무성서원에서 발기하여 순창, 곡성, 남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방을 붙여 의병을 모으니 그 수가 2백을 넘게 되었으며19일에는 순창 군아를 습격하여 포진하고 있었으나 20일 조정에서 황제의 착명으로 해산을 종용받게 되고 이어서 전주에 주둔하던 일군의 공격을 받아 처절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임병찬과 선생을 위시한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조우식, 이용길, 조영선, 유해용, 양재해, 나기덕등은 면암을 둘러싸고 죽음을 맹세하여 흩어지지 않았으니 이들이 곧 세상에서 말하는 순창의 12의사(義士)들 이었다. 매천야록 (梅泉野錄)>에 의하면 「21일 전주대 (全州隊)는 최익현과 12명이 북상하는 것을 뒤쫒아 
사령부에 수금하였다. 최익현은 평소 중망이 있었고 충의가 일세에 뛰어났다. 그러나 군대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나이 또한 늙어서 일찌기 기모(奇謨)가 있어서 승산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며 수백명의 
오합지졸은 모두 기율이 없었고 유생종군자 (儒生從軍者)는 큰 관을 쓰고 넓은 옷소매의 의복을 입어 
과거장에 나가는 것 같았으며 총탄이 어떠한 물건인지도 알지 못했다. 」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들이 
패하자 많은 사람이 슬퍼하는 모습을 적고 있다. 27일 서울 남대문안 왜병참에 구금된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내 굴하지 않고 계속 갇혀 있다가 6월 25일에서야 형(形)을 정해 내리니 최익현은 
감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 선생과 고석진은 사삭(四朔)을 가수(加囚), 나머지 김기술등 아홉사람은 
태 100장으로 석방시켰다. 

7월 8일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의 왜병영으로 이수하고, 선생과 고석진은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가 
10월 25일에야 석방시켰는데 열두의사중에 선생의 나이가 가장 적을 뿐아니라 사실상 면암을 호남지방 
으로 불러들여 의거함에 선생의 역할이 가장 컸고, 전후 보급에 천여석에 가까운 가산을 모두 의연하였 
으니 영호간(嶺湖間)에 당시 떠도는 말로 「면암이 없으면 습제도 없다 하거니와 습제가 없었다면 면암 
또한 없었다.」는 말이 결코 틀린말이 아닌 것이다. 

선생은 출옥 후 대마도 옥중에서 순절한 면암의 영구를 부산에서 맞아 들여 정산까지 모셔다가 정성 
스럽게 치상한후 고향인 진안으로 돌아와 은거했는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는 두류산의 암곡을 오르 
내리며 통한의 나날을 보내다가 아예 하동군 청암면 학동으로 처자를 이끌고 들어가은둔했다.말년에는 
면암의 사적을 수집하여 일성록(日星錄)을 증보하기도 한 선생은 1959년 9월 10일 지리산 밑 구례 사동 
본제에서「사문(師門)의 일은 문인의 책임인데 나는 우리스승님께 죄를 많이 짊어졌다」고하며 78세를 
일기로 50여년전 돌아가신 면암의 뒤를 따랐다. 

묘(墓)는 하동군 청암면 방사동 북쪽 언덕에 있고 지금 고향인 진안성수면에는 삼우당의 엣터에 약간의 
각자(刻字)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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