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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480 임진왜란과 곰티재 전투 관리자 07/13 11:46:23 785

1592년 (宣組 25년) 4월 14일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선봉장으로 하여 20여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로부터 7년동안 조선 강토는 전화(戰禍)에 휩쓸려 수많은 사상자와 재산피해를 입었으니 이것이 미증 유의 임진왜란이다.

부산(釜山)에 상륙한 왜군은 먼저 부산진을 함락하여 첨사(僉使) 정 발(鄭 撥)을 살해하고 이어서 동래(東萊)를 함락하여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전사 시킨후 3로(三路)로 길을 나누어 파죽지세로 공략에 나서 5월에는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까지 몽진해 버렀으니 조선 천지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으며 왜군은 눈을 돌려 다시 전라도 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중로(中路)를 담당한 소서행장 부대가 남쪽으로 쳐 내려 왔다. 금산을 거쳐 용담(龍潭)과 진안(鎭安)을 점령한 왜군은 곰티재를 넘어 전주(全州)를 공략하려 했다. 이미 소서행장은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郭再祐)와 옥천(沃川)에서 거병한 조 헌(趙 憲)에게 진로를 저지 당하며 혼줄이 나 있었던터라 곰티재 전투에 당하여서는 독이 올라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우리측으로는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곰티재의 중복에 포진하고 의병장 황복(黃僕)은 그전방 제 1선에 진을 쳤으며 김제군수 정담이 곰티재의 정상에 제 3진을 치고 적을 기다렸다.

7월7일 수천을 헤아리는 적의최선봉대가 조총을 쏘고 칼검을 휘두르며 전진하여 오니 제1선과 제2선에 포진한 황 복과 이 복남이 결사혈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7월 8일 적은 전병력으로 다시 공격하여 왔다. 혈전끝에 황 복은 마침내 힘이 다하고 중앙 제2선의 이복남의 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승세를 잡은 적은 계속 정담의 진으로 올라오고 이 복남의 제2선도 무너지니 정담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화살이 다되어 백병전까지 벌인끝에 장열한 전사를 하였다.

그의 종사관 이 방도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찌르고 죽었다.

해남 현감(縣監) 변 응정(邊應井)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이 복남은 전주 북 십리지점인 안덕원에까지 물러서서 주둔 하였다. 이 때 정담의 비장(裨將) 강연(姜連)과 박 형규(朴亨圭)도 적 수명을 쏘아 죽이고 전사 하였다.

결국 7일부터 8일밤 까지 곰티재를 지킨 우리 군은 왜군의 주력을 분쇄하고 후퇴하긴 했지만 이 전투는 길이 빛날 승전(勝戰)으로 호남을 지키는데 의의가 컸다.

이 곰티재전투 말고도 임진. 정유란중 진안에서는 마령의 월운 골짜기, 마이산 골짜기, 북수동 골짜기, 백운면 등지에서 의병들이 출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진안읍 죽산리어은동 골짜기에서도 혈전을 벌였는데 그후 이 골짜기를 왜너더리라 불러오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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