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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486 천주교 박해와 어은동 성당 관리자 07/13 11:47:28 863

신작로에서 보면 동네가 있을것 같지 않은 깊숙한 산고르 진안읍 죽산리 어은동은 카톨릭의 4대박해(四大迫害)를 견디어 내고 진안땅에 카톨릭을 이어온 성지(聖地)였다. 천주교는 이조 오백년 동안의 봉건적 사대주의로 어쩔수 없이 이단시 됐고 고난과 순교를 감수해야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유년(辛酉年) 1801년, 기해(己亥) 1839년, 병오(丙午), 1846년, 병인(丙寅) 1866년의 사대수난의 피의 역사는 참혹한 대박해였다. 더욱이 1866년(高宗 3년)의 대박해는 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하여 2만명의 천주교 신자중 절반인 1만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천주장이를 잡아 극형에 처하라는 대원군의 추상같은 명령과 함께 내려진 철퇴였다. 이런 찬바람이 부는 1866년 12월 눈보라를 헤치며 첩첩 산중인 진안읍 죽산리 어은동 골짝으로 성모마리아를 외우며 신도들은 모여 들었다. 이곳은 너무나 은밀한 곳이어서 「 천주장이 」를 잡으러 오는 관래도 없거니와 숨어 다닐 필요도 없었다.

포교차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인 신부「 캐비비 」를 중심으로 교우들 끼리 마음을 터놓고 천주님을 기구하고 잡혀죽은 교우들의 명복을 기구할 수도 있었다. 이 골짝에 들어온 신자 중에는 남편과 부모를 관졸들에게 잡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는것을 보고온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놓고 스스럼없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으니 고향을 떠나왔어도 좋았다. 낯선 산골의 생활이지만 같은 처지의 교우들과 뜻이 상합하여 천주의 가호아래 생활할 수 있다는게 큰 기쁨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밀이 연락되어 모여든 신자의 수가 150명이 되었다.

집을 간단히 지어 집회소로 삼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 생활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모여드는 신자의 수효가 많아 집회소가 좁은게 걱정이었으나,신도중 장수사람 김마리아라는 사람이 자기집을 뜯어다 더 늘려 지었는데 이게 바로 12평짜리「 어은동 공소 」이다.「 어은동 공소 」는 본도에서는 둘째로 역사가 깊은 교회이다. 천주교의 연중행사에 따라 어은동에서도 춘추 1회씩 신부의 참석아래 고해성사를 실시한다. 현재 어은동에서는 거리관게로 공소를 분리하여 「 평촌공소 」,「 동구점공소 」,「공동공소」,「서토실공소 」를 두고 공소마다 책임자인 회장 1명씩이 있어 공소를 관리하며 운영하고 있다.

지리적인 관계로 피난처로 최적지인 어은동에는 6. 25사변 당시 각처에서 피난민이 많이 모였으며 공산 괴뢰군이 후퇴 할때에도 피해가 없었다. 진안지방에서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용담이 처음이었다. 신유(辛酉)박해때 충청도 사람 김풍헌이 용담에서 가족들과 숨어 포교하다가 병들어 죽었고 기해교난때는 이 아오스딩(택심)등이 순교했다.

1876년에는 드게뜨 최신부와 박신부가 입국하여 다시 전교에 활기를 띠었으며 백신부가 용담에 들어 왔다. 1889년 이후 진안에 천주교 본당이 들어섰으며 1910년에는 김양흥 신부가 어은동에 들어가 목조로 성당을 신축하기도 했다. 한편, 한들성당은 1922년 이양화 신부가 신축했다. 6. 25동란때는 진안군내 4명의 성직자들이 북괴군에 끌려가 순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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