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리 원신기(元新基)와 평지(平地) 마을

  • 작성자 : 문화관광과
  • 등록일자 :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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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면

    성수면

23. 신기리 원신기(元新基)와 평지(平地) 마을

유래와 역사

원신기(元新基), 내곡(內谷), 평지(平地) 3개 자역부락을 신기라 불렀으며 2013년 1월 1일 평지가 분리되었다. 원신기는 경로당을 가운데 두고 서쪽은 아래뜸, 동쪽은 웃뜸을 이룬다. 내곡도 서쪽이 아래뜸, 동쪽 외약골쪽은 웃뜸이다. 평지는 마을 회관이 있는 지방도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뉜다.

신기마을은 조선중엽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원신기에는 서흥 김씨가 과거에는 전체 가구의 3분의 1을 차지한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이웃 마을인 상기마을 중터에 서흥 김씨가 조선중엽에 들어와 11대째 살아가고 있는 점은 신기마을 형성 연대를 조선중엽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원신기는 원래 마을 터가 오늘날 빈터라고 부르는 자리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다. 빈터는 원신기 경로당에서 동쪽 문수골 방향으로 500여m 지점에 있는 산기슭이다.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마지막으로 집이 네 채 허물어지면서 마을 터는 완전히 빈터가 되었다.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빈터는 ‘열 두 대문 집’이 있을 정도로 큰 마을 터였다고 한다. 현재 지목이 대지(垈地)로 되어있는 땅 세 칸과 연기에 검게 그을린 채로 발견되는 구들돌들은 이 터가 집터였음을 확실히 알려주는 증거다.

전해오는 또 다른 말에 따르면 초가지붕이던 시절이 원인이 현재 알려지지 않은 큰 화재로 집들이 소실되면서 새롭게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새터 또는 신기(新基)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1950년대 초에는 단 한 집만 있었다고 한다. 원신기는 뒷산에 와우혈 명당이 있어 눈(누운)소골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눈소골이 문수골 또는 문수동으로 불렀다. 원신기에서 상기마을 송촌을 이어주는 고개 이름도 문수골재다.

내곡의 원래 이름은 안골이다. 마을 이름을 한자화하여 내곡(內谷)이 되었다. 내곡에는 1960년대 중반에 22가구까지 살았는데 함양 박씨가 5가구였다고 한다. 내곡의 마을 터는 본래 일제강점기 말기에 설치된 안골방죽(신기제)자리였다. 안골방죽 안쪽까지 35가구가 거주한 큰 마을이었고 골짜기 골짜기에 경장지가 30여 마지기나 되었다고 한다. 안골방죽은 현재 자리보다 더 위쪽인 마산 쪽에 설치될 예정이었고 측량도 이루어진 상태였다. 지금 자리에 저수지가 축조된 사연은 이렇다. 당시 마을에 도둑질을 일삼고 불량한 주민이 한 사람 있었다. 주민들 다수가 그 사람을 마을에서 추방할 방편으로 마을 터에 저수지를 만드는데 합세했다. 결국 저수지 위쪽에 있던 집들은 뜯겨지고 여러 집이 마을을 떠나 마을의 세(勢)가 위축되고 말았다.

평지(平地)는 평평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시암을 파면 지금도 자갈과 모래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평지마을이 하천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에는 34~35가구가 살았다. 현재 각성바지 마을이나 과거에는 여산 송씨가 5~6가구 거주했고 전주 유씨도 여러가구 살았다. 청주 한씨도 마을의 한 성씨를 이루었다. 평지는 풍수적으로 배터라고 한다. 육지에 대면 짐을 실어야 하고 짐을 실으면 곧 떠나야 하는 것이 배이듯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 금방 부자가 되지만 늦지 않게 떠나야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은 이와 관련된다. 평지는 궁터라고도 한다. 마을 뒤 산진날이 활대, 마을 앞을 흐르는 구신천이 활시위에 해당한다. 마을 남쪽에 있는 고덕산은 화살을 담는 전통에 비유된다.

 

지명

  ◦ 가장골 : 원신기 동쪽, 내곡 못 미쳐 있는 골짜기. 입구에 아장사리터가 있었다. ‘가장’은 가장자리다. 따라서 ‘가장골’은 중앙에서 벗어난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다.
  ◦ 갈미봉 : 평지 남서쪽, 소정이들 서쪽에 솟은 두 봉우리. 갈매봉이라고도 부른다. ‘갈’은 ‘갈래’를 뜻하고 ‘미’는 산을 의미한다. 따라서 ‘갈미봉’은 ‘두 봉우리로 갈라지는 산’을 말한다. 갈미봉을 기점으로 서쪽은 임실 도봉리, 서북쪽은 금정리, 북쪽은 횡암이다. 이 산은 산봉우리가 갈모처럼 원뿔모양이기도 하다.
  ◦ 구렛보 : 방아실 이라고도 한다. 평지에서 남족으로 400m 거리에 있는 보로, 구렛보들에 물을 대는 데 이용된다. ‘구레’는 ‘구렁’이라고도 하는데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땅바닥’을 말한다.
  ◦ 구렛보들 : 평지 남쪽 가까이에 있는 들
  ◦ 구름보 : 평지 남쪽에 있는 보. 구름만 끼어도 물이 고인다는 말이 전한다. 위치로 보아 구렛보의 딴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 금정교 : 임실군 관촌면 금정마을과 평지를 이어주는 다리.
  ◦ 꺼꾸리뫼 : 내곡 안쪽 깊숙한 골짜기 산날망(용더기날맹이)에 있는 묘. 특이하게도 산날망 쪽을 바라보게 묘를 썼다.
  ◦ 낙운토골 : 평지 남서쪽 금정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
  ◦ 내곡(內谷) : 원신기 동쪽 외약골 아래 자리잡은 마을. 안골.
  ◦ 내곡방죽 → 안골방죽.
  ◦ 노적봉 : 평지 동쪽, 안골방죽 남쪽에 있는 산봉우리. 내곡 앞산이다.
  ◦ 눈소골 : 원신기 옛 이름이라는 말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고로(古老)들도 전설로만 들어온 이름이다.
  ◦ 당산재날 : 평지 동쪽에서 남북으로 뻗어있는 산등성이 동쪽으로 용더기날과 이어지고 남쪽으로 시동 뒷산과 만난다. 곧 내곡과 시동을 남북으로 잇는다. 시동 골짜기 쪽으로 당집과 한점막(한증막)이 있었다,
  ◦ 덜미보 : 평지에서 남쪽으로 800m 거리에 있는 보. 구신리와 경계지점. 보 안에서 방짝돌을 뜯어다가 썻다. 확독(학독)이나 구수(구유)용 돌을 뜯어내기도 했다.
  ◦ 뒷들 : 평지 뒤(북쪽)에 있는 너른 들.
  ◦ 마산 : 신기저수지 바로 안쪽에 있는 산. 옥녀봉이라고도 한다.
  ◦ 만뎅이밭골 : 내곡 통시골 아래 있는 골짜기. 만뎅이는 먼정이가 변한 말이다. 먼정이는 만장이, 즉 뱃머리가 뾰죽한 배를 뜻하는 고어다. 배 모양을 한 밭이 있어 붙은 말이다.
  ◦ 매본재날맹이 : 원신기 동쪽, 안골방죽 북쪽에 있는 산날망. 매 형국이라고 한다. 신선이 피리 부는 형국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매’가 산(山)을 뜻하는 고어(古語) ‘미’의 변형이므로 ‘매봉’은 ‘산봉우리’의 뜻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문수골 : 원신기 동쪽으로 깊숙이 나 있는 골짜기
  ◦ 문수동(汶水洞) : 「호구총수」 (1789년)에 기록되어 있는, 원신기의 옛 행정지명.
  ◦ 박산 : 평지 마을회관 뒤(동쪽)에 있는 야산. 박씨 선산.
  ◦ 방앗보 : 경지정리로 지금은 없어진 자라배미 천변에 있던 보. 물의 낙차를 이용한 방아실이 있던 자리.
  ◦ 버드냇보 : 원신기 서쪽 씨름판들 밑(하류)에 있는 보.
  ◦ 복치(伏鶅) : 원신기 동쪽에 문수골에 있는 산봉우리, 풍수적으로 어미 꿩이 새끼를 품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307m.
  ◦ 부들배미 : 평지 뒷들에 있는 여덟 다랑이 논. 다섯 마지기 가량이다. 물 사정이 좋아 과거에는 인근에서 수확이 가장 많은 논이었다.
  ◦ 부치댕이 : 갈미봉 남쪽 기슭.
  ◦ 빈터 : 원신기 동쪽에 있는 경작지.
  ◦ 빈터 모탱이 : 원신기 위에 있는 낮은 산자락. 1971년도에 리기다소나무로 수종을 교체하는 대단위 조림사업이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참나숲이 우거져 있었다. 아장사리구데기라고도 한다.
  ◦ 산막자리 : 통시골 깊숙한 곳에 있던 산막 터.
  ◦ 산진날 : 평지를 뒤(북)에서 감사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 지방도로로가 나면서 날이 잘렸다. 평지 뒤에 가늘고 길게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산진날’은 ‘긴 산 날’을 뜻하는 것 같다.
  ◦ 새보 : 평지 남쪽 200m 거리에 있는 보로 구렛보와 송찬호네보 사이에 있다. 논에 물을 대는 구멍이 없어 보 구실을 못하고 있다. 구렛보들 옆.
  ◦ 서당골 : 작은외약골 동쪽, 마산 옆으로 난 골짜기.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고 하나 흔적을 찾기 어렵다.
  ◦ 소막골 : 쇠막골, 새막골로도 부른다. 안골방죽에서 동남쪽으로 난 골짜기로 소막(牛舍) 흔적이 남아있다. 절골 동쪽.
  ◦ 소정이들 : 평지 남쪽 구랫보 옆에 있는 들. 면적은 10여 마지기 정도다. 아무리 가물어도 20~30마지기 들에 댈 수 있는 물은 내려온다고 한다.
  ◦ 소정이 모탱이 : 신기마을과 시동마을 경제지점의 모롱이.
  ◦ 신기(新基) → 신기리
  ◦ 신기리 : 원신기, 평지, 내곡 세 자연마을을 아우르는 행정리 이름.
  ◦ 신기제 → 안골방죽.
  ◦ 씨름판들 : 원신기 마을 서쪽에 붙어있는 들. 하천이 범람해 늘 모래판이어서 씨름판이 벌어지곤 했다. 씨름배미라고도 한다.
  ◦ 씨름판보 : 평지 서쪽에 있는 보. 씨름판들에 물을 댄다.
  ◦ 아장사리구데기 → 빈터모탱이.
  ◦ 아홉골 : 원신기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 가수마을과 신기마을을 가른다. ‘아홉골’은 가수마을 주민들의 표현이다. 상가수의 안산(案山)이다. 아홉 개 골짜기가 있으며 서쪽 끝에 사두혈 명당이 있다.
  ◦ 안골 → 내곡
  ◦ 안골방죽 : 신기제 또는 내곡저수지라고도 한다. 내곡 동쪽에 있는 저수지로 1943년 설치했다.
  ◦ 오소리 밭골 : 안골방죽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오소리가 많았다고 한다. 동쪽으로 절골, 소막골, 통시골 등이 이어진다.
  ◦ 옥녀봉(玉女峰) → 마산
  ◦ 외약골 : 내곡이 자리잡은 골짜기. 마을 왼쪽에 있기 때문에 외약골이다.
  ◦ 요골 : 평지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평지 앞들에 물을 댄다. 큰 요골과 작은 요골로 갈라진다. 요골은 골짜기가 오목한 모양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 요골방죽 : 평지 동남쪽에 있는 저수지. 1965년 설치. 제방길이 83m, 제방높이 10m, 몽리면적 13㏊.
  ◦ 용더기 : 평지 동쪽 큰 골을 감싸는 산날로 용데기라고도 부른다. 신기 세 자연마을을 품에 안는 모양새다. 용은 용(龍)을 의미한다. ‘더기’는 ‘덕’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고, ‘데기’는 ‘더기’가 변한 것이다. ‘덕’(德)은 고(高)·산(山)과 관련된다. 따라서 ‘용더기’는 용산(龍山), 즉 용 모양을 가진 높은 산이다. 용더기에는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드러누워 있는 형국, 즉 황룡부지의 명당이 있었다고 한다.
  ◦ 용더기날맹이 → 용더기.
  ◦ 우근이골 : 원신기 서쪽, 금정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
  ◦ 원신기(元新基) : 신기마을을 구성하는 세 자연마을 가운데 하나.
  ◦ 원신기방죽 : 1977~1978년경 준공. 2000년도에 문수골을 경지정리하면서 두 배 가량 확장 보수했다. 길이 50m, 넓이 5~6마지기, 몽리면적 약 1만5천 평.
  ◦ 자라배미 : 구랫보들 남쪽에 붙어있는 자라 모양의 2마지기 들. 2000년 경기정리 후 형태가 사라졌다.
  ◦ 작은외약골 : 외약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외약골처럼 마을 왼쪽에 있다.
  ◦ 장구배미 : 평지 뒷들 상단에 있는 한 칸 논. 장구처럼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모양이었으나 경지 정리 뒤 그 모양은 없다.
  ◦ 잿마당거리 : 원신기 모정 앞 둔덕. 상당히 높았으나 길이 나면서 지금은 평지가 되었다. 재가 마당이 되었기에 ‘잿마당’ 거리이다.
  ◦ 전통산 : 내곡 뒷산. 산기슭에 천안 전씨 제각과 비석이 있다. 조선 후기 무신인 전동흘이 통상 벼슬을 지낸 데서 유래했다. 전통상이 전통산으로 은근히 바뀐 경우다.
  ◦ 절골 : 오소리 밭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
  ◦ 점터(店-터) : 요골방죽 남쪽, 소정이들 동쪽 산기슭. 옹기를 만들던 자리여서 옹기 조각이 발견된다.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 큰골 : 내곡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용더기날이 에워싸고 있다.
  ◦ 통시골 : 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변소를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에서는 ‘통시’라고도 한다. 들일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 세운 변소가 있던 곳이다.
  ◦ 평지(平地) : 내곡, 원신기와 함께 신기마을을 이루는 자연마을.
  ◦ 홈보 : 원신기 서쪽, 버드냇보 아래(하류)에 있는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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